> 프로그램 > 화랑스님의 금요법문 > 공지사항
프로그램 PROGRAM
BBS 부산경남 라디오830
마음 대로(大路) 라디오 주석입니다
무명을 밝히고
목종스님의 월요법문
진푸티선사의 화요법문
도명스님의 수요법문
효범스님의 목요법문
정타스님의 금요법문
종진스님의 토요법문
찾아가는 라디오
뉴스·제보
방송편성표
BBS공개방송 지난방송듣기
BBS특집방송 지난방송듣기
BBS부산 지난방송듣기
 
BBS 문자 참여하기 #4899
BBS 영상서비스
 
화랑스님의 금요법문
프로그램 메인 지난방송 듣기 청취자 게시판 공지사항
제   목 : 12월 16일 금요법문 내용입니다.
등록일 : 2017-01-04 조   회 : 182 글쓴이 :  제작부
동지(冬至)(2016년동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서는 이 날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동지는 명일(明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시식(施食)으로 팥죽 쑤어 이웃과 즐기리라.
새 책력(冊曆) 반포(頒布)하니 절후 어떠한고.
해 짧아 덧이 없고 밤 길어 지루하다.”

동지는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
대설(大雪)과 소한(小寒) 사이에 들며, 태양이 남회귀선, 곧 적도이남 23.5°인
동지선(冬至線)에 이르는 때입니다. 이때 태양은 가장 남쪽에 위치하는데 북반구는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날이 됩니다.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서 양력 12월 21일 또는 22일에 듭니다.
올해는 21일 (음력11월 23일) 노동지 입니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라고 하는데,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이다. 올해는 하순이므로 노동지 입니다.

고대인들은 이 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주(周)나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에서는 동지를 새해의 시작 곧 설로 삼아
천지신명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이러한 문화가 생긴 연유는, 동지가 바로 󰡐가는 해의 끝이면서 오는 해의 양(陽)기운이
처음 태동하는 진정한 새해 첫 날󰡑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동지를 '다음 해가 되는 날[아세亞歲]' 혹은 '작은 설' 이라 하여 크게 축하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새해 달력을 주고받고 했습니다. 「亞;버금, 작은, 흉하다」

그래서 옛 말에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 라는 말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동짓날은 어려운 백성들도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즐기는 날이었습니다.

󰡔동지에 얽힌 불교 설화󰡕
1) 선덕여왕과 지귀(志鬼) (善德女王;27대, 성, 김 휘 는 덕만(德曼)? ~ 647년 음력 1월 8일 , 재위: 632년 ~ 647년)

선덕여왕은 신라 제 27대 임금으로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아주 돈독하여 국사를 돌보는 바쁜 중에서도
매일 조석으로 황룡사에 가서 예불 올리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저녁 여왕이 예불을 드리러 가는 도중에 난데없이 어떤 남자「그는 활리역(活里驛) 사람」가
여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우기에 여왕은 시종을 시켜 그 남자에게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소란을 피운 남자가 말하기를, "소인은 지귀(志鬼)라고 하는데 평소부터 여왕님을
남몰래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여왕님의 예불 행차를 몰래 지켜보기 여러 날 이었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왕이 재차 묻기를, "행차를 늘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냐?" 하니 지귀가, "예,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여왕마마께 제 연모(戀慕)하는 마음을 하소연하려고
행차에 뛰어든 것입니다."

원래 자비로운 품성의 소유자인 선덕여왕은 그를 참으로 가엽게 생각하여 황룡사까지 동행하게 했습니다.
이윽고 황룡사에 도착하여 절문 앞의 9층탑 곁에 이르자 여왕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귀(志鬼)에게 말하기를.

"내가 부처님께 예불을 마치고 그대를 궁으로 데리고 갈 것이니 이곳에서 잠깐만 기다리거라"
그러나 밖에 남게 된 지귀는 일각이 여삼추(一刻如三秋)라 예불 시간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에 심화(心火)가 끌어올라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참, 지귀란 양반 성미도 급하지.
그 후에 죽은 지귀는 그야말로 사랑에 한을 품고 죽은 몽달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니
신라의 방방 곡곡에는 이 지귀의 행패가 심하여 많은 사람이 해를 입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이 지귀 귀신의 달래주기 위한 방편으로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끓여 집집마다 대문에 뿌리고
길에도 뿌렸더니 귀신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다른 설」
심신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지귀는 그만 그 자리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여왕은 불공을 마치고 나오다가 탑 아래에 잠들어 있는 지귀를 보았다.
여왕은 그가 가엾다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팔목에 감았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 위에 놓은 다음 발길을 옮기었다. 여왕이 지나간 뒤에 잠이 깬 지귀는 가슴 위에 놓인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는 놀랐습니다. 그는 여왕의 금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 기쁨은 곧 불씨가 되어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숨이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가슴 속에 있는 불길은 몸 밖으로 터져 나와 지귀를 어느새 새빨간 불덩어리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랑과 기쁨의 감정이 폭발하여 현실의 불로 나타났다는 말).
처음에는 가슴이 타더니 다음에는 머리와 팔다리로 옮아가서 마치 기름이 묻은 솜뭉치처럼 활활 타올랐습니다.
지귀는 있는 힘을 다하여 탑을 잡고 일어서는데 불길은 탑으로 옮겨져서 이내 탑도 불기둥에 휩싸였습니다.
지귀는 꺼져 가는 숨을 숨을 내쉬며 멀리 사라지고 있는 여왕을 따라가려고 허위적허위적 걸어가는데,
지귀 몸에 있던 불기운은 거리에까지 퍼져서 온 거리가 불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지귀는 불귀신으로 변하여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불귀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선덕여왕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을 지어
백성들에게 내놓았습니다.
「심화요탑(心火繞塔)이란 제목으로 박인량의 수이전에 실렸다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전재되었습니다.」

“ 지귀는 마음에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백성들은 선덕 여왕이 지어 준 주문을 써서 대문에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화재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불귀신을 물리치는 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는 불귀신이 된 지귀가 선덕 여왕의 뜻만 쫓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 팥죽과 나한님

동짓날에 절에서는 팥죽을 쑤어 대웅전이며 나한전 등에 공양을 올리고 온 대중이 팥죽으로
공양을 하며 한 해의 묵은 때를 벗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하사라는 절의 공양주 보살은 그만 동짓날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공양주 보살.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인데 잠만 자고 있습니까? 빨리 일어나세요"
스님의 호령 소리에 겨우 기지개를 펴고 나오던 공양주 보살은, "허 참, 오늘이 바로 동짓날 아닙니까?
동짓날! 빨리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지요." 하는 말에 그만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갔지만, 늦잠을 잔 덕분에 아궁이의 불씨마저 꺼져 버리고 회색 재만
남아 있었습니다.

옛날인지라 불씨가 다 사그라들고 없어져버리면 불씨를 다시 얻어 오기 전에는 부엌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양주 보살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해 질 수 밖에.
부처님께 죄송한 마음은 둘째 치고 당장 주지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 만 같아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결국 생각다 못한 공양주 보살은 절 아래 동네의 김서방네 집에 가서 불씨를 얻어오려고
부리나케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날따라 찬바람이 쌩쌩 불고 눈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니 김서방네 집은 천리 만리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겨우 김서방네 집에 도착한 공양주 보살은 큰 소리로 김서방을 불러 자초지종 사정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김서방은, "아까 행자님이 오셔서 불씨를 얻어 갔는데 불이 또 꺼졌나요?" 하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행자님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행자님이 없는데요?"
"그래요? 하지만 조금 전에 어떤 행자님이 와서 배가 고프다고 하시면서 팥죽까지 한 그릇 드시고
불씨도 얻어가셨는데"

마하사에는 행자 스님이라곤 없었으니, 공양주 보살은 마치 귀신에 홀린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급한 마음에 불씨를 빌려 가까스로 절에 도착했으나 더욱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부엌의 아궁이에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양주 보살은 급히 서둘러 팥죽을 쑤어 먼저 법당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곧 나한전으로
팥죽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나한님께 팥죽을 올리던 공양주 보살은 그만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공양주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계시는 나한님의 입가에 붉은 팥죽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고, 나한님. 잘못했습니다."
공양주 보살은 그대로 엎드려 크게 절을 올렸습니다. 김서방네 집에서 팥죽을 얻어 드시고
불씨를 얻어다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 행자는 바로 그 나한님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절에나 나한전에 모신 나한님은 모두가 미소를 머금고 계시고 그 입술은 한 결 같이 붉은 색인데,
이는 바로 동짓날 드신 그 팥죽이 묻어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팥죽의 유래󰡕

옛날 중국에 공공씨(共共氏)라는 사람에게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아주 성질이 나빠 나쁜 짓만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데 죽어서도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하고 귀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되어도 보통 귀신이 아니라 역질(疫疾), 즉 나쁜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염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궁리 끝에 동짓날 생전에 그가 가장 무서워했던 팥으로 죽을 쑤어
대문이나 집안의 판자에 뿌려 그 역질 귀신을 퇴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의 형초라는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6세기경 중국 양(梁)나라의 종름(宗懍)이 쓴 연중 세시기.이책은 월별로 민간의 생활풍습을 서술한
한국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전해오는 이야기이고, 이와 같은 관습이 토착화된 데에는
음양오행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음양오행학상 붉은 색은 밝음, 즉 광명(光明) 빛을 표시하는
양(陽)이 대표적인 색깔입니다.
붉은 색깔은 음양(陰陽)상으로는 양(陽), 오행(五行)상으로는 화(火=불), 계절로는 여름,
하루로 치면 정오(正午), 방위로는 남쪽, 오장육부(五臟六腑)에 대비할 때는 심장(心臟),
오상(五常=인간의 감정)으로는 예(禮)에 속합니다.

한편 어둠은 음(陰)에 속하고, 음(陰)은 색깔로 치면 흑색, 즉 검은 색으로 대표하게 됩니다.
검정색은 오행(五行)상으로는 수(水), 방위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 하루가운데는 한밤중,
오장육부에 대비하면 신장(腎臟)에 해당하고, 오상으로는 지(智)에 속합니다.

이처럼 붉은색과 검은색은 오행상 서로 반대되는 관계에 있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붉은색은
태양을 상징할 뿐 아니라 낮과 밝음과 건강을 상징하는데 반하여 흑색은 이와는 반대로
밤, 어둠, 질병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질병이 드는 것은 전부 귀신의 소행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귀신은 어두운 밤에만
활동을 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귀신 이야기를 듣다보면 귀신은 밤에만 활동을 하다가
새벽 첫 닭이 울면 서둘러 사라져 버립니다. 무당이 하는 굿도 밤에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밝은 곳에서는 귀신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였듯이 농업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농산물 가운데서도 붉은 색깔을 띤 팥은 밝음을 상징하는 곡식으로
신성하게 여기게 되었고,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결부되어 이 팥은 어둠 속에서만 활동을 하는
귀신을 쫓아내는 효험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치가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전글    12월 09일 금요법문 내용입니다.
다음글    12월 23일 금요법문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