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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2017년 1월 06일 금요법문 내용입니다.
등록일 : 2017-01-04 조   회 : 223 글쓴이 :  제작부
마조선사의 홍주종을 비판한 규봉종밀선사 그리고 그 반론 2

정유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어제가 성도재일 이었네요. 여러분 절에서도 성도재일 전날 밤에
철야정진을 하셨습니까? 부처님은 이 성도라는 사실이 없었다면 우리들에게 깨달음의 진리와
그 진리를 깨닫는 수행의 방법인 참선명상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지도 안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지난시간에 ‘홍주종은 불성의 작용만을 보고, 본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의 습성을 들어 파도와 같은 용만을 본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런 다음 하택종에 대해선 영지불매(靈知不昧)한 공적심(空寂心) 즉 진성(眞性)을 나타내는 입장으로
공적지라고도 하여 「知之一字 衆妙之門」이라는 본체를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 종밀이 말하는 지란 쌓아서 얻어지는 앎도 아니며, 터득하여 얻어지는 지혜도 아니다.
인간의 본성으로서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어서 자연히 항상 아는 앎(知)이다.
홍주종과 하택종에서 말하고 있는 불성(佛性)이론을 한마디로 정리해 보면, 마조가 말하는 심(心)은
중생심 전체가 다 부처라고 하는데, 종밀은 불성, 진성만을 부처로 보는 견해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종밀은 또한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에서 마니보주가
다양한 색을 비추는 작용에 비유하여 선과 교의 3종에 대해 비판하며
홍주종과 하택종의 차이를 언급하였습니다.

마니구슬의 비유

북종은 흑색의 바탕에 투명한 밝은 구슬이 있다고 여겨,
흑색을 제거하고 밝은 구슬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으로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두종은 밝은 구슬이 무색투명하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하여
구슬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고 한다.

홍주종은 현재의 검은색이 그대로 밝은 구슬이라고 여기어
미혹과 깨달음의 구별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택종은 무색투명한 구슬이 투명하기 때문에 일체의 색채를 나타낸다고 하는 본체와 작용의 양면을
올바르게 파악한 것이며, 일체의 차별상을 뛰어넘는 절대존재로서의 밝은 구슬이기 때문에
비로소 일체의 색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신회의 무념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자부한다.

특히 하택종과 홍주종에 대해 비교하였는데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점은 종밀이
홍주종을 방계라고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합니다.

또한 본체와 작용에 관해서, 진심의 본체에는 두 가지 작용을 가지고 있다.
제일은 자성(自性)의 본질적 작용이고 제이는 인연에 따른 응용이다. 이것을 구리거울에
예를들면 거울이라고 하는 물건(質)은 자성의 체이고 개개의 대상이 비추어지는 것은
연에 따르는 응용이다. ···· ( 중략 ) ·····
마음이 항상 고요함(常寂)은 자성의 체이고, 마음이 항상 안다고 함(常知 )은 자성의 응용이니
말하고 분별하고 동작하는 것들이 연을 따르는 응용이라고 한다.
즉, 제2의 작용은 제1의 작용에 의해서 존재될 수 있는 것으로, 제1은 불변(不變)의 체에 해당되고
제2의 작용은 대상에 따라서 작용하는 부차적인 작용이다. 라는 것입니다.

진심의 본체 : 1) 자성의 본질적 작용(실질적 본체)
2) 인연에 따른 응용
거울 : 1) 항상 비추는 것(실질적 본체)
2) 여러 영상
항상 고요함(자성의 본체) : 1) 항상 아는 것(常知)
2) 말하고 동작하는 것

따라서 홍주종에서 주장하는 ‘우리들이 실제로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하는 따위의 행동이
다 불성의 작용이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인연에 따른 응용이기 때문에, 자성의 본질적 작용이
결여되어 있다고 규봉은 홍주종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하택종은 ‘자성용(自性用)의 본지(本知)로서 자성의 본질적 작용을 실증하는 면에서 볼 때
홍주종보다도 하택종은 뛰어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돈오점수에 대해 비교해 보겠습니다.
홍주종의 마조는 ‘말하고 움직이며 밥 먹고 일하는 일상적인 평상시의 마음이 곧 부처이며(卽心是佛)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자체가 도(平常心是道)이므로 굳이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道不用修)’라고
그의 어록에 전하고 있습니다.

홍주종의 3세 황벽희운(黃檗希運, ? ~856)도 『전심법요(傳心法要)』에서, 몰록 지금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돈오하면 얻을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다. 이것이 최상의 도이며 진여불(眞如佛)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완릉록(宛陵錄)』에서는 곧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위로는 제불(諸佛)로부터 아래는 준동함령(蠢動含靈)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으며
동일한 심체(心体)이다. 그러므로 달마는 서천으로 부터 와서 다만 일심의 법을 전하여,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이며, 수행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것임을 곧바로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다만 지금 곧바로 자기의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보아, 결코 달리 찾아서는 안 된다.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지금 그대들이 말하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그대들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조와 황벽의 선사상은 바로 이렇게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몰록 자각하는 돈오(頓悟)이면서
수행을 가자하지 않는 돈수(頓修)를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종밀은 돈오점수를 주장하였습니다. 『도서』에서 주장하는 5종선(五種禪) 가운데
다섯번째인 최상승선(最上乘禪)을 들어서 규봉의 돈오점수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만일 스스로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번뇌가 없고, 열반의 지혜가 본래부터 완전하게 갖추어져
그 마음이 곧 부처이며(此心卽佛), 거기에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돈오하고 그러한 입장에서
수행한다면 그것은 최상승선으로 여래청정선 · 일행삼매 · 진여삼매라고 한다.
이 삼매들은 일체 모든 삼매의 근본이 된다. 라고 말합니다.

만약 끊임없이 수행하면(漸修) 백천삼매를 자연스럽게 얻게 된다. 달마문하로 내려온 선이 바로
이 선이다. 즉 종밀은 ‘최상승선이란 달마가 전한 선이며 돈오점수하는 선’이라고
정의 내리고있습니다.

또한 『도서』에서 ‘돈오는 아침에 밝은 해가 떠오르는 것이라면 점수는 그 해에 의해서
서리나 아침 이슬 등이 서서히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즉 밝게 비추어 아는 공적지(空寂知)를 굳게 알았으면(頓悟), 그 지가 밝게 비추는 능력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漸修)는 돈오점수설을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종밀은 본각진심(本覺眞心)인 공적지를 인식한 뒤, 실천한 점수만이 완벽한 수행이라는
수행관에 입각해‘점수가 없는 수행은 잘못된 수행인데 홍주종은 바로 그 점수를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와 같이 수행 차제에 있어서 규봉의 하택종과 홍주종이 달랐으므로, 홍주종의 수행론 또한
규봉종밀의 비판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홍주종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론을 펴게 됩니다.

앞에서 전개한 바와 같이, ‘보고 듣고 말하며 생각하는 모든 행위가 불성의 작용’이라고
내세우는 사상이 그릇된 것이라고 종밀이 홍주종을 비판했던 만큼, 본질적 작용이 결여되어 있으며
점수가 결하여 올바른 수행이 되지 못하는가에 대해 홍주종의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종밀이 말하는 지(知)는 모든 행위인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지가 아니라 그것의 근저에 있어서
견문각지를 견문각지답게 하는 원리적인 지입니다.

그러나 홍주종에서는 보고 듣고 말하며 행동하는 인간의 행위 하나하나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그 행위의 뒤에 숨어서 행위 하게 만드는 원리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에 주목하기보다는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되, 그 행위의 자취에 머물지 않는 자유로운 행위자체에 있습니다.

마조선의 작용주의는 행위의 선악, 시비에 구애됨이 없는 행위자체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되, 결코 그 행위에 머물지 않는 무심(無心)으로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무심에 관해 적절하게 잘 표현한 황벽(黃檗)의 설법에, 갠지스강의 모래는
제불 · 보살 · 제석천 · 범천들이 지나 갈지라도 모래는 기뻐하지 않는다.
또 소 · 양 · 벌레가 밟고 지나가도 모래는 화내지 않는다.
진귀한 보배와 향료가 쌓여 있다고 할지라도 모래는 탐내지 않으며 똥오줌의 악취에도
모래는 노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이 곧 무심을 요달한 마음이다.
일체분별상을 떠나 중생과 제불에 다시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게 되는 무심이라면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중략)······그런 마음이야말로 본원청정의 부처이며
누구나 가진 마음이다. 준동함영도 제불보살과 같은 것이고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즉 곧 무소주(無所住)요, 무심으로 홍주종의 무심은 작용에 있어 그 의미를 발휘한다.

이에 마조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즉 그대들이 그때그때 던지는 말 가운데에서도
대상 그 자체는 항상 그대로 진리인 것이며(卽事卽理),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깨달음의 경지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도리를 깨달으면,
때에 따라 옷을 입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며, 성인이 될 소질을 계속 키워 나가면서
흘러 가는대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라고 하고 있다.

즉 보고 듣고 말하며 행하는 모든 일상적인 생활에서 도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평상심 그대로의 발현이요, 전체작용인 ‘작용즉성(作用卽性)’인 것이다.
그러기에 마조의 제자 방거사는 신통과 묘용(妙用), 물을 나르고 또 섶을 나른다’ 고 표현하였고,

『돈오요문(頓悟要門)』의 저자 대주(大珠)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이 오면 곧 잠을 잔다’고 하여 일상생활, 그 자체에 철저함이
바로 깨달음의 경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마조는 ‘입처개진(立處卽眞)’ · ‘즉사이진(卽事而眞)’이라고 하였으며
마조의 4세인 임제(臨濟, ?~867)도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고 하였습니다.

당대의 선종사에 큰 주류를 이루었던 마조계(馬祖系)의 홍주종은 구체적인 일상 생활속에서
조사선으로 꽃을 발하였던 것입니다.

그 이후 홍주종의 선은 조주(趙州, 778~897), 임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등
큰 거목을 통해 선의 대하(大河)를 이루며 면면히 지금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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