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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1월 13일 금요법문 내용입니다.
등록일 : 2017-02-02 조   회 : 227 글쓴이 :  제작부
- 정중무상선사의 이근원통(耳根圓通) -

지난 주는 마조도일 스님의 홍주종을 비판한 종밀스님의 이야기를 했는데요.
오늘은 홍주종의 마조선사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스승이 신라출신 김화상이라고 하는
정중종의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선사의 이근원통의 수행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중국에서 활약한 선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신라출신 선사일 것입니다.

정중무상선사는 신라 성덕왕(聖德王)의 셋째 왕자로써, 728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5조홍인–신수–지선-처적으로 이어지는 처적(處寂, 648~734)선사에게서 공부하고
사천(四川)지방에서 주로 활약한 선사입니다.

정중무상선사는 중국에서 활동하다 입적했기 때문에 의외로 우리나라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의 사천지방에서는 오백나한의 한 분으로 455번 째로 일컬어질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스님입니다. 현재에도 무상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무상은 주로 김화상(金和尙)으로 불렸는데, 선종사에서 속가의 성으로 불린 예는
마조도일(馬祖道一)선사 외에는 없습니다. 마조(馬祖)란 속성이 마씨(馬氏)이기 때문에
마조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만큼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천지방에서 활약한 무상선사는 정중종(淨衆宗)을 개창하였으며, 보당종(保唐宗)을 개창한
보당무주(保唐無住)선사가 바로 직제자였습니다.

무상선사에 대해서는 크게 다음 세 가지 점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티벳에 중국선불교를 전파 / 마조도일과 동학으로 같은 선풍 / 삼구설과 인성염불의
이근원통입니다.

1)티벳에 중국불교를 전파
티벳은 지리적으로 중국의 사천지방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티벳에 중국의 선불교를 전한 사람이
바로 무상이라는 것이 티벳의 역사서인 《바쎄(sBa bzhed)바쌍시의 여행보고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티벳의 왕자 찌송데짼에게는 가르겐 쌍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쌍시는 중국에서 온 사신(使臣)의
아들이었습니다. 가끔 왕자가 불교의 경전에 대하여 물어오면 쌍시는 자세히 대답해 주었으므로,
찌송데짼은 점점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부왕 찌데꾸쩬(704-754)왕은 드디어 왕자를 위해서 중국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들이고자 결심하고 쌍시 등 4인을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서방에서 보살이 오신다’‘라고 예언되어 있었기에, 바쌍시 일행이 도착하자
중국의 승려들은 환영하여 맞이했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경전 천 권을 하사하여
티벳에 불교가 전해지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 후 일행은 티벳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랑이를 끌고 가는 익주김화상과 만났습니다.
그 때 김화상은 쌍시일행에게 “지금 티벳에는 부왕이 죽고 대신들에 의해서 파불(破佛)이
일어나고 있으니, 뒤에 왕자가 왕이 된 후 불법을 전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후 쌍시 일행은 오대산(五台山)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기적을 접하고 티벳에 돌아가니
과연 김화상의 말대로 파불 중이었습니다. 쌍시일행은 중국에서 구해온 경전들을
침뿌의 동굴 속에 감추고 시기의 도래를 기다렸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찌송데짼왕자가 왕이 되자 불교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쌍시는 김화상의 말을 기억하고 동굴에서 경전을 가지고 와 왕에게 바쳤습니다.
왕이 먼저 『십선경(十善經)』을 읽으니 신심이 일어났고, 다음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으니
크게 불법을 존경하게 되었고, 『도간경(稻竿經)』을 읽자 왕은 점차로 청정행(淸淨行),
청정견(淸淨見)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은 불법을 진심에서 믿게 되었고
티벳에 정식으로 불법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이 티벳에서 불교를 도입하게 된 경위입니다.
뿐만 아니라 티벳에는 무상선사의 어록이 티벳어로 번역되어 있다고 합니다.

2)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과 동학(同學)

마조도일의 고향은 사천성(四川省) 한현(漢縣)입니다. 그런데 마조도일은 출가한 직후
처적에게 공부하였는데, 이때 무상도 처적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마조선사가 구족계를 받았을 시점인 20세 전후에 무상선사와 함께 공부했다고 생각됩니다.

이때 이미 무상은 사천지방에서 이름난 승려였으므로, 마조선사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에서 말해지듯이 무상이 마조의 스승은 아닙니다. 무상과 마조는 사형사제 간이었으며,
마조의 스승은 육조혜능의 제자인 남악회양(南嶽懷讓)이기 때문입니다.

3)삼구설(三句說)과 인성염불(引聲念佛)

무상선사는 항상 삼구 즉, 무억(無億)·무념(無念)·막망(莫忘)의 세 가지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무억이란 말 그대로 해석하면 ‘억측(추모)하지 말 것’인데, 이것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무념이란 ‘현재에 있어서 지혜와 상응하여 어둡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또 막망이란 ‘미래의 일을 미리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무상은 제자들에게 항상 인성염불(引聲念佛)을 수행하게 하였는데, 인성염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소리를 크게 하여 염불하다가 점점 소리가 작아져서, 결국에는 소리가 없어지게 한다.
즉 ‘아미타불’하는 소리를 마음속으로 잦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번뇌가 다시 커지면,
또 염불하여 아미타불을 마음속으로 염합니다. 이와 같이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여 마음속에 두어,
무상(無想)으로 되면 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김화상은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천만 인을 위하여 수계하였습니다.
엄숙하게 도량을 시설하여 스스로 단상에 올라가서 설법하며, 먼저 인성염불(引聲念佛)을 하며
일성(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하고, 염불 소리가 없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설합니다.
'무억·무념·막망 하라. 무억은 계요, 무념은 정이며, 막망은 혜이니라.' 이러한 삼구는
바로 총지문이다.

인성염불이란 것이 과연 어떤 염불법인가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는 '일성(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하고, 염불 소리가 없어졌을 때'라는 대목입니다.

먼저 인성염불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처럼 '나무아미타불'을 소리내어 외우는 염불법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성(一聲)'이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여러 글자가 아닌
어느 한 글자에 집중하는 염불법으로 보여집니다.

그 한 글자는 '나'가 될 수도 있고, '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성(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한다'는 것은 '나…' 하고 소리를 내든지, 또는 '오…ㅁ' 하고 소리를 내면서
몇 분이 됐든지 간에 계속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소리를 내다보면 자연스럽게 숨이 다 내뱉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부처님을 염한다거나 아니면 그 글자가 지니는 뜻에 집중하는 염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서방정토를 염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인성염불이 목표로 하는 최종 도달처가 무념이라는 점에서
인성염불(引聲念佛)은 칭명염불(稱名念佛)이나 관념염불(觀念念佛), 관상염불(觀想念佛)
또는 기타 다른 염불의 형태하고도 다른 것입니다.
무념이란 한 생각 일으키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데, 어떻게 부처님을 생각한다거나 또는
염을 관한다거나 상을 관할 수 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볼 때 무념과 염불은 양립하기가 어렵습니다.
인성염불은 그 표현에 있어서 인성 다음에 염불字(자)가 붙어 있어서 일단 염불의 범주에 넣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인성염불 하면 관습적으로 염불선의 범주에서 파악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인성염불은 기존의 어떤 염불(선)과도 다른 형태로 보아야 맞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성염불은 염불(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염불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인성염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염불에 중점을 두어 왔습니다. 즉 염불은 염불이되 인성(引聲)하는
염불이라는 해석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새롭게 이해하는 방식은 인성(引聲)이라는 글자에 보다 주목해 보는 것입니다.
염불은 별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인성(引聲)이란 글자 그대로 소리를 끌어당김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아…'나 '미…' 또는 '오…ㅁ'이 됐든지 간에 하나의 소리를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끌어당긴다는 것은 자기가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숨을 다 내뱉게 할 때까지 한다는 표현으로 보아서 한참 동안 발성했던 것 같습니다. 숨을 내뱉게 하기위한 발성에 집중할 뿐, 소리가 지닌 의미에 집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성염불은 오직 소리에 집중(관)하는 수행법으로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인성염불의 정확한 이름을 붙인다면 '인성수행법(引聲修行法)'
또는 소리명상 소리참선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인성염불이 소리에 집중하는 인성수행법이라고 할 때, 이 수행의 방식은 『능엄경』에 나오는
이근원통(耳根圓通)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성염불을 이근원통으로 판단하는 첫번째의 근거는 소리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성염불이라는 것이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법이라는 이유에서 입니다.
인성염불에는 결코 염불적인 의미나 방법이 들어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수식관을 하거나
화두를 잡는 선법도 아닙니다. 이근(耳根)을 통하여 소리에 대한 집중을 중시하는 특이한 수행법입니다.
따라서 인성염불과 이근원통은 양쪽 모두 인성(引聲)을 통한 수행법이라는 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번째 근거는 『역대법보기』나 티벳의 마하연측에서 돈오를 주장할 때마다 등장했던
'일근기반원 육근성해탈(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이 이근원통 장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능엄경』 권6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듣는 놈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소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있게 되었네. 듣는 놈을 돌이켜,
소리에서 벗어나면 해탈한 놈을 무엇이라 이름하랴! 하나의 근이 본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개의 근이 해탈을 이루게 되리라.……여섯 개의 근도 이와 같아서 원래는 하나의
정밀하고 밝음에 의지하여 이것이 나뉘어 여섯 개와 화합하나니 ...

『능엄경』의 권수(卷數)를 나누면 전체가 10권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중에서 6단락 즉 권6은
'이근원통'장입니다. 이근(耳根)의 작용과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할당된 파트가 바로
권6의 '이근원통'장인 것입니다.

이 장에서 '일근기반원 육근성해탈(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은 이근의 원통(圓通)함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원통이란 표현은 '부분이 아닌 전체' 즉 '편벽되지 않고 두루 통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능엄경』 권6의 주장은 이근(耳根)을 닦아야 만이 두루 통하게(원통)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근기반원(一根旣返源)의 일근(一根)이란 이근(耳根)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근(耳根)을 통하면 나머지 근(根)도 다 통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인성염불이 이근원통이다'라는 근거는

첫째, 양쪽 모두 소리〔聲〕에 집중하는 수행법이라는 점,
둘째, '일근기반원(一根旣返源)'의 돈오 논리가 이근원통을 설명하는 논리라는 점입니다.
즉 『능엄경』 이근원통의 탁월성을 설명하는 논리가 '일근기반원(一根旣返源)'인 것입니다.
'일근기반원(一根旣返源)'의 원래 의도는 돈오의 홍보가 아니라 이근원통의 홍보용이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근원통의 방법을 다시 정리하면 일단 바깥의 소리 또는 내면의 소리에 집중합니다.
소리의 종류는 바람소리나 물소리도 가능하고, 염불·주문·독경소리도 가능합니다. 이때 염불이나 주문, 독경이 지니는 문자적 의미는 문제가 안 되고 오직 소리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좀 더 나아가면 인체 내의 챠크라가 돌아갈 때 발생하는
북소리나 플룻소리 등을 들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 소리마저 떠나버립니다. 이처럼 소리에 집중하는 이근원통의 수행법은
『능엄경』에서 제시하는 독특한 수행법이기 때문에 '염불선'과도 다르고 기타의 선법과도 다릅니다.

삼구 즉, 무억(無億)·무념(無念)·막망(莫忘)의 세 가지를 기억합시다.
무억이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념이란 ‘현재에 있어서 지혜와 상응하여
어둡지 않는 것’이니 항상 현재에 충실합시다. 남방불교의 싸띠처럼 말입니다.
또 막망이란 ‘미래의 일을 미리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 처럼
과거심 미래심 현재심을 얻을 수 없을 때 지금 이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이전글    2017년 1월 06일 금요법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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